사후 276년에도 제일 잘나가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 [사람들] 천재는 살아서 무시당하고 죽어서 추앙받는다
서울 어딘가의 카페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다. 바리스타는 무심히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손님은 노트북을 두드린다. 아무도 아, 바흐! 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냥 공기처럼, 배경처럼.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1750년에 숨을 거둔 독일 아저씨의 음악이, 왜 오늘 대한민국 카페 배경음악이 되어 있는가.
이게 바로 바흐다.
바흐가 자신의 악보 샘플을 들고 있는 모습의 초상화, 1748년.(위키피디아)
열 살에 부모 잃고, 마흔에 아내 잃고, 그래도 악보를 썼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685년 3월 21일 독일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1645~1695)는 지역 음악인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 레메르트(1644~1694)는 바흐가 아홉 살 때 세상을 떴다. 이듬해엔 아버지마저 갔다. 열 살짜리 고아 소년은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의 집에 맡겨졌다.
형은 그나마 악보를 좀 가르쳐줬다. 다만 이 악보는 네가 보기엔 너무 어려워 라며 자기 귀한 악보들을 장롱에 잠가뒀다고 한다. 어린 바흐는 밤마다 달빛에 기대어 문틈으로 악보를 베껴 썼다. 그 결과는? 시력 저하. 훗날 말년에 거의 실명 상태가 됐으니, 바흐의 눈은 문자 그대로 음악을 위해 소진됐다.
여기서 잠깐. 이 대목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공부하지 말고 자라 는 말을 들으면서 이불 속에서 몰래 책 읽던 아이들. 입시 금지곡을 새벽에 이어폰 끼고 듣던 중학생들. 시대도 나라도 다르지만, 하고 싶은 것을 몰래 해야 하는 처지 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바흐는 스물두 살에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1684~1720)와 결혼해 자녀 일곱을 낳았으나 아내는 1720년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이듬해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 뷸켄(1701~1760)과 재혼, 이후 자녀 열세 명을 더 낳았다. 합계 스무 명. 현대 한국에서라면 아마 저출생 대책 홍보 포스터 모델 0순위였을 것이다. 물론 당시 영아사망률이 높아 성인까지 산 자녀는 열 명 남짓이었지만, 어쨌든 바흐의 가정은 상시 소규모 합창단 규모였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 1685년(위키피디아)
직장인 바흐, 갑질 상사, 박봉, 그리고 사직서
바흐는 평생 교회와 궁정에 고용된 월급쟁이 음악인 이었다. 아른슈타트(1703~1707), 뮐하우젠(1707~1708), 바이마르(1708~1717), 쾨텐(1717~1723),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이프치히(1723~1750)까지 직장을 여러 번 옮겼다.
그 중 압권은 바이마르 시절. 바흐는 더 좋은 자리를 얻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했다가 영주 빌헬름 에른스트(1662~1728)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1717년 한 달 가까이 직권구금 을 당했다. 말하자면 해고통보 대신 감옥에 집어넣은 셈이다. 그래도 바흐는 그 안에서 오르간 소품을 썼다는 설이 있다. 구금 중에도 악보를 쓰는 인간. 이게 집념인지 도피인지는 각자 판단하시길.
라이프치히에서의 27년은 더 가관이었다. 성 토마스 교회의 합창장으로 일하면서 바흐는 매주 교회예배를 위한 새 곡을 써야 했다. 한 주에 한 곡. 52주면 52곡. 5년이면 260곡. 실제로 그는 칸타타(교회음악의 일종)만 200곡이 넘게 작성했다. 현대식으로 치면 매주 마감원고를 쓰는 기자와 같은 처지인데, 그 원고가 모두 걸작이라는 게 문제다.
더불어 시의회는 바흐를 탐탁찮게 여겼다. 원래 그 자리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1681~1767)이 오기로 돼 있었는데 텔레만이 거절하자 차선책으로 바흐를 뽑은 것이다. 의회 기록엔 실제로 이런 말이 남아 있다: 최고를 못 얻었으니, 중간 수준이라도 써야지. 세계음악사 최고의 거장을 두고 차선책 이라 평가한 라이프치히 시의회, 여러분은 그 의원들 이름을 기억하시는가? 아무도 모른다. 바흐만 남았다.
1798년 이전에 게벨 이 그린 바흐 초상화.(위키피디아)
바흐가 죽고 나서 벌어진 일들, 재발견의 역설
바흐는 1750년 7월 28일, 예순다섯의 나이로 라이프치히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그는 이미 구식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아들들, 특히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1788)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가 훨씬 요즘 스타일 로 이름을 날렸고, 아버지 바흐는 구닥다리 취급이었다.
그런데 1829년, 스무 살의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이 거의 100년 묵은 악보, 바흐의 마태 수난곡(1727년 초연)을 무대에 올렸다. 공연은 대성공. 세상이 뒤집어졌다.
이게 100년 전 음악이라고?
이후 바흐는 빠르게 음악의 아버지 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죽고 나서 79년 만에 재발견된 것이다. 생전엔 차선책이었던 인간이.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무언가를 떠올릴지 모른다. 살아생전 가난과 냉대 속에서 작품을 남겼다가 사후에 국가 문화유산이 된 예술가들.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생전에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고, 시인 김수영(1921~1968)은 변두리 양계장을 운영하며 시를 썼다. 천재의 비극적 공식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살아서 외면 받고, 죽어서 동상이 세워진다.
1908년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앞에 세워진 바흐 동상(위키피디아)
바흐의 유산, 수학처럼 엄밀하고, 시처럼 아름답고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이유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대략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엄격한 규칙(대위법, 즉 여러 선율이 독립적으로 진행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기법)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발견한 사람이었다.
푸가(둘 이상의 성부가 같은 주제를 돌아가며 모방하는) 형식을 생각해 보자. 바흐의 푸가는 수학 증명처럼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감동적이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바흐를 특히 좋아했는데,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우주가 논리적으로 짜여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고 했다. 과학자가 음악에서 수학적 아름다움을 본 것이다.
바흐의 고르게 조율된 클라비어 곡집(1722년, 1742년)은 모든 조성(장조·단조 합쳐 24개)을 체계적으로 탐구한 작품으로, 이후 서양음악의 기초가 됐다. 비유하자면, 한글 자모 체계를 완성한 것처럼, 그는 음악의 문법 을 완성했다.
아인슈타인, 1947년(위키피디아)
오늘 한국에서 바흐를 읽는 법
자, 이제 핵심이다. 바흐의 이야기가 오늘의 한국에 어떤 말을 건네는가.
첫째, 지금 당장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다 는 위로. 라이프치히 시의회가 바흐를 차선책이라 불렀듯, 지금 이 사회도 수많은 사람에게 넌 2순위야 라고 말한다. 취업시장에서, 입시에서, 각종 선발과정에서. 하지만 역사가 기억하는 건 시의회가 아니라 바흐다. 차선책 소리를 들어도, 자기 일을 계속하는 자가 남는다.
둘째, 제도와 싸우되 일은 멈추지 않는다. 바흐는 구금도 당하고, 급여도 깎이고, 상사에게 무시도 당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악보를 썼다. 부당한 구조에 저항하는 것과 자기 일을 계속하는 것은 양립 가능하다. 오늘 한국의 노동현장에서도 이 두 가지는 함께 필요하다.
셋째, 재발견에는 중간 다리 가 필요하다.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바흐는 지금도 묻혀 있을지 모른다. 사장된 가치를 세상에 끄집어내는 사람, 오래된 것을 새롭게 조명하는 편집자, 큐레이터, 기자, 활동가.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에도 아직 재발견되지 않은 바흐들이 숨어 있다. 비정규직 예술가, 지방문화인, 기록되지 않은 장인들.
넷째, 형식과 자유는 적이 아니다. 바흐는 엄격한 교회규율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틀을 깨야 창의성이 나온다 는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믿는다. 하지만 때로는 틀을 완전히 이해하고 내면화한 다음에야 진짜 자유가 온다. 규칙을 무시하는 것과 규칙을 초월하는 것은 다르다.
멘델스존 초상화(위키피디아)
바흐는 열심히 했을 뿐 이라고 했다
바흐에게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 누구든지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나만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겸손한 말이다. 동시에 잔인한 말이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 정도로 부지런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를.
바흐는 1750년에 죽었다. 그의 음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어딘가의 카페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아무도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음악은 계속 흐른다. 인정받지 못해도, 잊혀도, 구금당해도.
그게 바흐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우리가 닮아야 할 모습이다.
바흐가 직접 쓴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 1번 1악장 악보(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