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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㊴] 몸맘얼 꿰뚫움, 가온 돎

[다석의 한글철학 ㊴] 몸맘얼 꿰뚫움, 가온 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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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깨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떻게 깨어날 수 있는지를 묻는 순간, 우리는 쉽게 막힌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이루고, 더 많이 가지는 것으로 깨어날 수 있을까. 다석은 이 물음에 다른 길을 제시한다. 잘 깨어나는 삶은 바깥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속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그래서 그는 몸맘얼 ‘꿰뚫기’라는 가온 돎의 솟대를 세웠다. 먼저 ‘몸성히’다. 이를 까닭은, 삶의 첫 자리가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꼴에 크게 흔들린다. 지쳐 고달프면 판가름이 흐려지고, 많이 먹으면 마음이 둔해지며, 뒤범벅으로 꼬인 나날은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몸이 흐트러진 꼴로는 제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오래가지 않는다. 몸을 저절로의 숨결에 맞추고, 숨빛을 돌게 하며, 가온 돎을 세우는 일은 ‘꿰뚫기’의 가장 낮은 디딤돌로 보이지만, 실은 모든 삶의 밑바탕이다. 몸이 서야 마음 자리가 비로소 솟는다. 그러나 몸이 바로 섰다고 곧바로 삶이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맘놓이’를 다잡아야 한다. 마음은 늘 움직이고 흔들린다. 기쁨에 슬픔이 돌아가고, 들끓음에 하고픔이 오간다. 이런 돎을 억지로 멈추려 하면 되려 더 커진다. ‘맘놓이’는 마음을 없애는 게 아니다. 마음을 바로 보는 길이다. ‘생각불꽃’으로 갈 곳을 세우고, 그쪽으로 밀어서 뿌리내리며, 묻고 불려서 깨닫고 풀어낸 징검다리를 하나둘셋 거치면 마음은 시나브로 가벼워진다. 다른 생각이 일어도 거기에 끌려가지 않는 힘이 난다. 마음이 아랑곳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삶은 제 자리를 잡는다. 그렇다고 ‘꿰뚫기’가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바르고 곧은 데에만 머무르면 또 다른 ‘굳은 자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 ‘바탈태우(뜻태우)’를 바래야 한다. 바탈(本性)은 본디 있는 그대로이나, 생각에 사로 잡히고 버릇의 껍질이 점점 붙는다. 그래서 그것들을 태워야 한다. 다 불살라야 한다. 태우는 일은 제 ‘고픔’을 뛰넘는 일이다. ‘뛰넘-용오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뻥 뚫고, 집집 우주를 보며 제 ‘있꼴(存在)’를 크고 넓게 뚫어 보아야 한다. 마침내 ‘줄곧뚫림’에 이르면 삶은 한 줄이다. 몸-맘-얼이 ‘몸맘얼’ 하나로 뚫려서 한 줄이다. 앎과 삶이 하나로 ‘산알’이다. 따로 놀지 않는 자리다. ‘몸성히’는 밑자리, ‘맘놓이’는 치우치지 않는 고름, ‘바탈태우’는 하나로 뚫어 뀀이다. 이 세 길은 따로 떨어진 징검다리가 아니다. 한 곳 한 흐름이다. 몸을 세우고, 마음을 놓고, ‘있꼴’을 밝히는 길은 나날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결국 ‘꿰뚫기’의 솟남은 제자리 찾는 일이다. ‘몸맘얼’이 나뉘지 않고 하나로 숨돌리는 것, 그것이 이 ‘꿰뚫기’가 돌리는 숨길이다.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쓴 노자 늙은이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또한 이 글에 가져다 쓴 다석어록”은 1993년 홍익재에서 펴낸 『씨ᄋᆞᆯ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 온통이다. 여기서 가져왔다. 열쇳말 : 몸성히 – 맘놓이 - 바탈태우   그림1)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한 철조약사여래좌상 머리다. 다석은 ‘몸성히’를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우는 일’이자 모든 삶의 밑바탕이라고 했다. 철불(鐵佛)이 보여주는 견고하고 묵직한 질감은 삶이 이어지는 첫 자리인 몸을 ‘주춧돌’처럼 다지는 뜻에 부합하며, 약사여래가 가진 치유 상징성도 몸을 성하게 보살피는 ‘살림’ 뜻과도 이어진다. 1. 몸성히, 몸 세우는 세 디딤 다석 ‘몸맘얼’ 꿰뚫기에서 가장 먼저 드러내는 것은 마음도, 깨달음도 아닌 ‘몸’이다. 많은 사람이 꿰뚫기를 고요한 생각에 잠김, 혹은 이를 데 없이 높깨어 다다른 큰 ‘몸꼴’로 알아차리지만, 다석은 꿰뚫기 한 걸음을 아주 낮은 자리, 곧 나날이 낮아지는 낮춤에 둔다. 왜 낮추고 낮춘 몸일까? 몸은 누리와 만나는 첫 자리다. 숨 쉬고, 걷고, 먹고, 자는 모든 짓이 몸으로 이루어진다. 몸이 흐트러지면 마음도 흐트러지고, 몸이 급하면 생각도 급하다. 몸이 범벅이면 나날도 뒤범벅이다. ‘몸성히’는 그저 몸을 튼튼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힘 센 몸을 부리거나 괴로움 따위를 감당하는 힘도 아니다. 그것은 몸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바로 세운다’는 말은 가지런히 선다는 뜻이다. 때맞춰 결이 흐르고, 숨쉬기로 숨돌리고, 가온데를 세우는 일이다. 저절로의 숨결로 몸이 맞추어 질 때, 마음은 숨을 타면서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바로 서지 않은 몸꼴로 마음만 뚫어 이루려는 따위는 오래가지 않는다. 지쳐 고달픈 몸이다. 흐트러진 나날살이다. 지나친 하고픔의 꿰뚫기는 영락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몸성히’는 꿰뚫어가는 밑바탕 만들기다. 주춧돌을 먼저 놓듯, 꿰뚫기 위해서는 먼저 바로 세워야 한다. 다석이 ‘몸맘얼 꿰뚫기’라고 한 것도 이 징검다리를 뚜렷하게 밝히기 위해서다. 몸이 성해야 마음이 놓이고, 마음이 놓여야 얼이 밝다. 이 몸성히 월(章)은 세 디딤돌, 곧 ‘녘-걷기․점심’, ‘땀-살림’, ‘숨-속알’의 디딤돌에 따라서 하나씩 살펴본 것이다 첫 번째 디딤. 녘-걷기․점심 첫 디딤돌은 몸에 때를 세우고, 몸에 든 하고픔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여기서 가온마음은 눈길 끝에 ‘녘’을 맞추는 것일 테다. 녘은 아침 저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하루가 저절로 돌아가는 바퀴살을 뜻한다. 해가 뜨고 지는 결에 나날살이 맞추는 것은 저절로의 흐름에 이어잇는 ‘번쩍임’이다. 밤까지 깨었다가 늦은 아침을 여는 나날은 몸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거꾸로, 해 뜰 때 일어나고 해 질 때 쉬는 버릇은 몸을 고요하게 가라앉힌다. 이는 나날살이 흐름을 되살리는 일이다. 이 디딤돌에서 가온꼭지는 걷기다. 걷기는 외곬으로 어수룩한 움직임이다. 가장 밑뿌리를 다지는 꿰뚫기다. 걸을 때 쉬는 숨은 저절로 고르다. 흥미롭게도 몸이 지나치게 북받쳐도 몸을 이루는 낱낱의 그물코는 즐겁다. 걷는 동안은 생각이 느려지고, 바싹 굳었던 몸도 시나브로 부드러워진다. 꾸준한 걷기는 몸을 무르게 하고 마음을 어수룩하게 돌린다. ‘점심(點心)’, 하루 한 끼로 하는 건 먹고픔을 알맞게 다스리는 일이다. 배부르기를 바라지 말 일이다. 몸은 두루 고르고 가벼워야 한다. 그런 꼴로 가눌 수 있으면, 몸은 맑아지고 넋은 또렷해진다. 이는 고픔을 끊어내는 일이 아닐 터. 스스로를 다스려 바로잡는 일이다. 먹고픔을 줄여야 하리라. 차고 넘치는 삶을 가벼이 해야 하리라. 다석은 한아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끼씩 먹는 일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녘을 맞추어 걷고, 또 고픔을 알맞게 지켜가는 일은 몸을 올바른 숨결로 두는 첫걸음이다. 두 번째 디딤. 땀-살림 두 번째 디딤돌은 몸의 숨돌림을 깨우는 일이다. 나날로 몸을 쓰지 않으면 둔해지고 약해진다. 나날의 찬물씻기는 몸을 깨우는 놀이가 된다. 차가운 물로 몸을 씻으면 몸은 살알 하나하나가 여울처럼 일어나면서 자잘한 느낌을 일으켜 세운다. 이렇듯 몸이 겪어야 할 것들을 겪을 때 살알의 느낌은 또렷해지면서 나른한 의식을 몰아낸다. 몸이 살아서 산 느낌으로 솟아 오른다. 산을 오르내리거나, 디딤돌 오르내리는 힘찬 뜀박질은 몸 속의 숨돌림을 세차게 돌린다. 오르막에서는 얼이 바짝 차려지고 내리막에서는 몸이 풀려 느슨하게 숨을 돌린다. 오르내리는 한 흐름에 몸맘얼이 바로 선다. 이 오르내림을 겪는 일은 몸에 산 힘을 크게 북돋는 일이다. 여기에 더해서 땀 흘려 일하는 몸짓은 몸을 살리는 가장 빠른 짓거리다. 깨끗이 치우고, 바르게 하고, 손으로 하는 일은 몸을 삶에 곁붙인다. 땀은 살아 움직이는 몸의 기쁜 숨짓이다. 다석은 도심(道心) 곧 진리된 마음으로 백성을 지도하면 백성이 이마에 땀 흘리는 것을 즐겨워한다. …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하지 않으면 한아님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땀 흘리고 난 뒤의 가벼움은 몸이 제 맡은 바를 다 한 뒤에 솟구치는 기쁨 때문이다. 다석은 이럴 때 기가 솟는다고 하여 ‘기뿜’이라고 했다. ‘살림’은 몸을 돌보고 보살펴 지켜간다는 말뜻이다. ‘땀-살림’은 몸을 텅텅 비워서 가볍게 그러나 단단하게 하는 것이고 몸이 살아 가도록 숨돌리는 일이다. 이 디딤돌에서 몸은 가만히 있는 ‘있꼴’에서 놀리고 움직이는 ‘놀꼴’로 거듭난다. 세 번째 디딤. 숨-속알 ‘몸성히’의 마지막 디딤돌은 가온마음을 세우는 일이다. 그 가온은 숨짓에서 비롯된다. 숨은, 깨어난 마음과 못 깨어난 마음 ‘사이-울타리’에 놓여 있다. 코로 천천히 숨쉬는 버릇은 몸을 자리잡게 하고 온몸의 그물코를 고르게 돌린다. 얕은 숨에 빠른 숨쉬기는 몸을 기우뚱하게 기울이지만, 깊고 고른 숨쉬기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속알(內丹), 곧 불숨의 숨밭(丹田)은 몸의 한 가온데다. 배꼽 아래까지 내려보내는 숨돌림은 ‘밝숨․불숨’을 모아 돌리는 거룩한 숨짓이다. 숨이 가온데에 있을 때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는 몸짓을 놀리는 솜씨가 아니고 몸꼴을 바로잡는 큰 깨달음이다. 가온데를 낮추는 삶은 그래서 스스로를 낮추면서 바로잡는다. 여기에 바르게 앉는 일좌(一座) 버릇이 더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온마음이 세워진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머리를 바르게 두어 가누어야 한다. 이것은 숨결을 둥글게 돌리는 길이다. ‘가온찍기’는 가온데를 바로 세우는 뚜렷한 깃대다. 숨을 고르고, 속알을 지키고, 몸을 가누는 일은 ‘몸성히’를 이루는 끝끝내다. 다석이 내가 숨을 쉰다는 것은 성령의 숨을 쉬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체득하는 것이다. … 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한아님의 아들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말씀 한 마디만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몸성히’의 뜻 앞서 말했듯이 ‘몸성히’는 꿰뚫기의 가장 낮은 디딤돌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오래가지 않는다. 몸은 어수룩한 몬지요, 먼저 갖춰야 바탕이기도 하다. 꿰뚫기의 나날살이를 오롯이 받쳐주는 밑바탕인 것이다. 그러니 때맞춰 숨결을 고르고, 제대로 숨을 돌리며, 뚜렷하게 가온데를 비워야 한다. 이것이 삶의 온통을 바로잡는 일이다. ‘몸성히’는 고픔을 끊어낸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다. 몸을 억누르거나 괴롭힌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몸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저절로에 몸을 놓아 두고, 지나침을 줄여야 한다. 산숨을 살리고, 가온을 돌려야 한다. 이는 남다른 솜씨도 아니고 남다른 힘도 아니다. 그런 것을 바래서도 안 된다. 누구나 나날살이로 해 나갈 수 있다. 몸이 성하면 마음 자리가 난다. 고달파 흐트러진 몸은 고요한 생각이 자라기 어렵다. 몸이 제자리를 잡아야 생각도 맑아진다. 그래서 ‘몸성히’를 꿰뚫기의 첫걸음이라 한다. 끊이지 않고 나아가는 주춧돌이라 한다. 그러므로 꿰뚫기가 한 줄이어도 몸은 늘 저를 돌려서 따져봐야 하는 자리다. 결국 ‘몸성히’는 ‘바르게 서 있음’의 다른 이름이다. 때맞춰 일어서야 한다. 때맞춰 숨빛을 돌려야 한다. 가온데를 잃지 않고 서 있어야 한다. 그런 몸에서만 ‘맘놓이’가 저절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런 뒤에 ‘바탈태우’가 솟는다. 그러니 ‘몸성히’는 어수룩하게 놓인 첫 디딤돌이 아니다. 꿰뚫기의 온통을 떠받치는 뿌리다.   그림2) 심우도(尋牛圖) 가운데 여덟 번째 단계인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도 잊고 사람도 잊어버린 상태를 커다란 ‘원(圓)’ 하나로만 나타낸다. 이는 다석이 말한 마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매달림이 없는 빈 바탕(빈탕)”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텅 빈 동그라미는 모든 가능성이 응축된 ‘가온’이다. 이는 빈 바탕에 솟은 첫 빛이자 ‘맘놓이’로 다다르려는 ‘하나’다. #2. 맘놓이, 마음 세우는 세 디딤 몸이 바로 서면 마음은 비로소 움 솟을 자리를 얻는다. 몸이 지쳐 고달픈 꼴로는 마음을 다스려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몸성히’ 다음에 오는 길이 바로 ‘맘놓이’다. ‘맘놓이’는 생각을 바로 쓰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아무 생각이 없는 꼴로 오해한다. 다석이 말한 ‘맘놓이’는 ‘생각없’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매달림’이 없는 자리다. 생각이 일어나도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북받친 느낌이 올라와도 매달리지 않는 힘이다. 마음은 늘 움직인다. 기쁘다가 슬퍼지고, 굳게 다짐해도 흔들린다. 이런 뒤바뀜을 억지로 그치게 하면 오히려 일이 더 커진다. ‘맘놓이’는 그침이 아니고 바로 봄이다.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 달라짐을 조금 떨어져서 오래 뚫어 보아야 한다. 뵈는 뵘을 마주 보면서 꿰뚫고 뛰넘어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징검다리를 한 번에 뛰넘을 수 없듯이 하루아침에 뛰넘을 수는 없으리라. 솟아난 생각을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버릇에 깨어야 한다. 믿(信) 세운 힘이 쓸데 있다. 믿고 밀어서 터지면 ‘단박에’ 깨진다. ‘맘놓이’는 세 디딤돌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생각불꽃’이다. 둘째는 ‘밀·믿·밑’이다. 셋째는 ‘물·불·풀’이다. 생각을 굴리는 슬기로 뚫어서 꿰어야 한다. 뚫어 꿰는 길에 참이 있다. 이 세 디딤돌을 건너면 마음은 가벼워지고 가온데를 갖게 된다. 네 번째 디딤. 생각불꽃 ‘맘놓이’의 첫 디딤돌(맨 처음부터 보면 네 번째)은 ‘생각불꽃’이다. 다석은 새벽을 귀하게 여겼다. 새벽은 하루 중 가장 조용한 때이며, 아직 세상 소리가 마음을 채우지 않은 때다. 이 때 한 생각을 또렷이 세우고 ‘생각불꽃’을 사른다.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내 머리가 하늘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벽의 한 생각이다. 이 생각불꽃은 ‘큰비롯(一始)’의 알맞이가 아니다. ‘성냄을 줄이겠다’는 다짐일 수 있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작은 불씨를 피우는 일이다. 다석은 사람이 새벽에는 높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높은 생각을 가지기 어려워진다. 낮은 몸 살림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낮은 이 땅을 떠나 영원한 절대로 올라야 한다.”라고 했다. ‘생각불꽃’은 눈길 가는 곳을 가리킨다. 생각 없이 하루를 일으키면 우리는 굳잡는 버릇과 뒤흔들린 느낌에 끌려다닌다. 그러나 한 생각으로 ‘큰비롯(一始)’을 세우면 그 생각이 하루를 비추는 불꽃이 된다. 이 디딤돌에서 읽고 꿰는 일이 함께 이루어진다. 읽고 그 뜻을 이어서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뀀’이다. ‘읽어뀀’은 속에 받아들이는 일이고, ‘꿰어냄’은 속을 엮어내는 일이다. 여러 생각이 한 줄기로 이어질 때 마음은 ‘빈-하나’로 뚫린다. 또한 오온(五蘊)과 ‘나나(私私)’를 살피는 나날 돌림이 귀하다. 닿는 몸에 일어난 느낌, 느끼어 일어난 마음이 내는 낌새. 그렇게 느끼어 낸 낌새가 모두 ‘나’인 것처럼 여기지만, 그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헛꼴이다. ‘성이 난다’고 해서 내가 성의 본꼴은 아니다. 이 헛꼴을 알아차려야 마음이 한 걸음 물러난다. ‘생각불꽃’은 마음 빈탕에 솟은 첫 빛이다. 불숨의 빛! 다섯 번째 디딤. 밀믿밑-말숨 두 번째 디딤은 ‘밀·믿·밑’의 사다리다. 맨 위 맨 아래가 없는 사다리. 미는 밀음은 마음을 밀어 비운다. 하루 동안 쌓인 걱정과 후회가 밀려나고, 쓸데없는 생각 따위를 밀려간다. 억눌러서 밀어내는 힘이 아니다. 저절로 흘러가게 놓아주는 비움이다. 놓아주는 자리에 저절로가 든다. 새로 솟는다. 놓아주니 새로 들고 든다. 새로 들어 솟으니 빈 자리가 찬다. 밀어 비워지면 믿어지리라. 믿음은 가온데 세움이다. 밀려나 비워졌다면 이제 저절로 무엇이 줏대가 될 것인지 바로 보아야 한다. 세워지는 그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 또는 어떤 삶이 옳은가를 또렷이 알아차려야 한다. 믿음은 흔들릴 때 돌아갈 자리이다. 소중함도 옳음도 돌아갈 자리에 있으나, 야물어 가는 자리는 아닐 터. ‘세움’은 속이 비었다. 대나무 속이 튼튼하게 비었듯이! 믿어 굳어지면 밑을 터야 하리라. 밑음은 그 믿음을 마음 깊은 빈탕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다석은 믿(信)이라는 말은 밀(推)다는 말이 믿이 되었다. ... 밀어서 터지도록 하라는 것이 믿(信)이다.”라고 했다. 글을 쓰거나 하루를 바로하며 한 글월로 줄여보는 버릇 들임은 생각을 단단하게 만든다. 말숨은 한마디로 올을 바로하는 것이다. 올바로다! 이 디딤을 거치며 마음은 점점 자리를 잡는다. 그렇다고 해서 뿌리내린 자리에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섯 번째 디딤. 물불풀-알맞이 세 번째 디딤은 물·불·풀의 되물음이다. ‘물’은 묻고 묻는 물음이다. 왜 이 일에 성을 내는가, 왜 이 일을 두려워하는가, 스스로 묻는 물음이다. 물음을 불려야 한다. ‘불’은 그 물음 속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이다. 오래 불리면 반드시 풀린다. ‘풀’은 그 깨달음이 풀어진 바다다. 물어 묻고, 불려 깨닫고, 풀리어 풀어낸 물음이 되물음으로 돌면서 쭈욱 이어지는 알맞이는 날로 살아서 번쩍인다. 아주 큰 번쩍 빛이 두터워지면서 ‘너나․없:비롯(始無始)’이 일어난다. 다석은 이때의 마음을 ‘ᄆᆞᆷ’이라 하였다. 제나의 ‘맘’이 아니다. 가온 돎(∞)에 하늘숨() 쉬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  ’ 을 찍는다.”,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점(點)이 하나 찍혀 있다. 이것이 참을 찾고 빛을 찾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되물음 속에서 슬기슬기가 솟는다. 슬기슬기는 조각난 소식이 아니라 하나 한 소식이다. 온통을 꿰는 한 소식이다. 겉을 꿰뚫어 속을 뚫어 뵈는 한눈이다. 나와 세계가 속으로 맞닿아 한꼴로 알맞이 드는 자리다. 스스로 알아차려 뻥 뚫리는 빈탕이다. 우주 온갖 것들의 안팎을 드나드는 눈! ‘맘놓이’는 아무 생각 없는 꼴일까? 생각에 끌려가지 않는 꼴이다. 그 어떤 느낌이 북받쳐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저 스스로 깊이 ‘없생각’에 잠긴 고요다. ‘생각불꽃’으로 갈 곳을 세워야 하리라. 밀어서 줏대를 뿌리내려야 하리라. 묻고 불려 풀어낸 깨달음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리라. 빈탕에 그리는 ‘없생각’ 꿍꿍이는 마음을 가볍게 하리라. 여기에 이르면 마음은 이제 기울어지지 않는다. 기뻐도 잘난 척하지 않고, 슬퍼도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 자리가 바로 ‘맘놓이’다.   그림3)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의 ‘석가모니 고행상’이다. 고행상은 피골이 상접하여 혈관과 뼈가 그대로 드러난 꼴이다. 이는 다석이 말한 제 ‘고픔’을 뛰넘는 일이며, 몸을 끝까지 밀어붙여 오직 ‘얼빛’만을 남기려는 ‘바탈태우’다. 몸꼴은 말라붙었으나, 움푹 들어간 눈동자 속에는 빛나는 슬기슬기가 서려 있다. 이것이 바로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내 머리가 하늘과 직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생각불꽃이다. 낮은 몸 살림을 떠나 늘에 올라 타려는 처절한 다짐이 눈빛에 담겨 있다. #3. 바탈태우, ‘있꼴’ 밝히는 세 디딤 몸이 서고 마음이 놓이면 ‘꿰뚫기’는 고른 자리에 이른다. 그러나 다석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없생각’에 잠긴 고요는 끝이 아니다. 그 자리는 다음 문을 여는 자리다. 마음이 고르다고 삶의 물음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물음이 비롯한다. 어떻게 하나 가득 밀썰되 다함 없이 솟날 수 있을까? 알아차리면 알음알이가 커질까? 알음앓이 없이도 알음이 깨질까? 이런 물음이 스르르 오른다. 이 물음 앞에서 다시 한 번 저를 뛰넘어야 한다. 다석은 ‘바탈태우’라고 하였다. 바탈은 하늘이 일러준 속알이다. 그런에 그런 속알에 먼지가 끼었다. 곁붙은 버릇과 못난 버팀짓, 저만 옳다는 생각의 틀이다. ‘태우’는 없애는 뜻이 아니다. 그 틀에 매이지 않음이다. 바탈태우는 ‘있꼴’을 밝히는 불꽃이다. 몸과 마음을 뛰넘어 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세 디딤돌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뛰넘-용오름, 둘째는 집집우주-높오름, 셋째는 줄곧뚫림이다. 일곱 번째 디딤. 뛰넘-용오름 뛰넘기는 스스로 세운 생각 틀을 뛰넘는 일이다. 신앙이란 뛰어넘는 것이다. 나를 뛰어넘고 세계를 뛰어넘어 가온찍기인 한아님께로 돌아가는 용오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기준과 세계관을 가진다. ‘꿰뚫기’를 하면서 쌓은 앎과 깸도 또 다른 틀이다. 이제 안다”는 생각은 아주 단단한 껍질이다. 뛰넘기는 이 껍질을 깨는 일이다. 옳다고 믿어온 생각을 꿍꿍해 보고, 붙잡았던 믿음 따위를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종교나 형이상학은 이 세상을 초월하자는 것이다.”, 위로 끌린다는 것은 몸을 초월하고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생사(生死)를 초월하면 그것이 자유요, 진리요, 사랑이요, 영원이요, 믿음이다.”라고.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세상을 뛰넘은 ‘초월’의 자리가 바로 지금 여기다. 뛰넘기는 한 번의 다짐으로 끝나지 않는다. 속으로 배어든 나날 익힘이 뒤따라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움직임보다 속에서 무르익는 때가 귀하다. 조용히 되새기고, 서두르지 않고, 내세우지 않아야 생각이 깊어진다. 그것은 불꽃을 숯불로 만드는 일이다. 겉은 조용한데 속은 뜨겁게 타는 자리다. 이 자리에 용오름이 일어난다. 용오름은 마음의 큰 용솟음이다. 뒤흔들림이다. 어느 날은 환히 보이다가도, 다른 날은 아무것도 모르게 느껴진다. 깸과 모름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 세 찬 오르내림을 뚫어가는 빛서슬이 길이다. 깬앎(意識)에 쏠리지 않고, 못깬앎(無意識)에 꺽이지 않으며, 고요히 견디는 힘이 생길 때 ‘있꼴’은 단단해진다. 여덟 번째 디딤. 집집우주-높오름 자기 틀을 뛰넘으면 눈이 크게 넓어진다. 집집 우주는 ‘있꼴’ 하나하나가 다 한 우주라는 알아 챔이다. 우주는 한 집안이다. 위로 하늘을 이고 아래로 땅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우주의 가온이며, 집집이 곧 우주의 성소(聖所)다. 사람 하나, 나무 하나, 작은 짓 하나도 가벼이 볼 수 없다. 어제는 내 생각이 가온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있꼴’이 가온을 가진다. 판가름보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솟는다.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곧곧하게 땅을 딛고 반드시 서야 우리는 산다. 곧이 곧게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이 정신이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崇天) 있는 것이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는 것이 옳다.”라고. 집집 우주를 보는 건 다름을 옳다고 여기는 일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하나의 세계다. 그 속에는 그 나름의 까닭이 다 있을 터. 그렇게 볼 때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사랑은 ‘있꼴’을 대하는 참 마음 꼴이 된다. 높오름은 넓어진 눈이 삶꼴로 드러나는 디딤돌이다. 기도 그리기는 마음을 위로 들어 올리는 뜻알(象徵) 나타냄이다. 기도는 겉꼴이 아니라 속꼴을 모으는 짓이며, 그리기는 삶을 새롭게 그리는 힘이다. 뜻이 꺾이는 ‘꺾임’을 겪어도 다시 일어나는 힘, 어둠에서도 빛을 찾으려는 마음이 높오름이다. 뛰넘는 일은 이 현실 바깥으로 뛰쳐 가는 게 아니다. 삶을 더 깊이 끌어안는 일이다. 이 디딤에서 알게 되리라. 아홉 번째 디딤. 줄곧뚫림 마지막 디딤돌은 ‘줄곧뚫림’이다. 여러 깨달음이 쌓여서 만들어진 꼴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한 줄로 뚫리어 솟는 ‘날벼락’ 겪음이다. 참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뚫리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얼이 몸과 맘을 뚫고 지나가 다시 하늘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산 삶이다. 다석은 우리의 숨줄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나다. 성령의 나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의 숨줄인 영원한 생명줄을 붙잡는 것이다.”라고 했다. 몸-맘-얼은 따로가 아니다. 앎과 삶이 나뉘지 않는 온통이다. 날벼락은 남다른 겪음도 아니다. 그저 나날의 고른 삶에 울리는 천둥 번개다. ‘줄곧뚫림’에 이르면 삶은 느릿느릿해지고 어수룩해진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말해야 할 말을 하되, 거기에 지나쳐서 매달리지 않는다. 뜻을 이뤄도 들뜨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가 저절로 자리 잡는다. 나보다는 너나들을 위해 고르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자잘한 보탬보다는 큰 흐름을 타고 간다. 이 맘꼴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몸성히’와 ‘맘놓이’를 거치면서 차곡차곡 다져온 밑바탕에 스스럼없이 열릴 뿐이다. ‘줄곧뚫림’은 그랫서 끄트머리다. 끝에 비롯이 솟았을 뿐이다. 남다른 때도 아니다. 나날의 삶 속에 쉼없이 이어지는 ‘ᄆᆞᆷ’ 가짐일 뿐이다. ‘바탈태우’는 꿰뚫기의 끄트머리 디딤이자, 가장 조용한 디딤돌이다. 자기 틀을 줄곧 깨면서 뒤흔들리는 범벅조차도 하나로 뚫어간다. 온갖 ‘있꼴’을 텅 빈 빈탕의 우주 하나로 본다. 마침내 한 줄로 다 뚫리는 자리까지 이르는 길. 이 길을 걸어야 ‘있꼴’이 시나브로 환빛이 된다. 몸이 서고 마음이 놓이면, 이제 삶의 온통이 꿰뚫어진다. 바탈태우는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는 일이다. ‘있꼴’을 밝히는 일은 이제 시나브로다. 나날 몸 거두는 꼴에 드러나리라. 이 자리에 이르면 ‘꿰뚫기’는 그냥 그렇게 사는 삶으로 저절로이리라. 무엇 하나 걸리는 게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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